하루살이, 붉은 엄지 손가락 지문 서평 리뷰

미야베 미유키, 하루살이

얼간이에 대한 선 감상

<얼간이>의 이모부-조카 콤비 헤이시로와 유미노스케가 등장하는 장편 연작소설. 같은 두 사람이 나올 뿐 전작인 <얼간이>와는 별개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얼간이>를 읽지 않으면 따라가기 힘든 부분이 여러 곳에서 발생했다. 뎃핀 나가야나 규베 이야기는 물론 아오이 마님과 사키치의 이야기도 <얼간이>에서 사전지식을 쌓지 않았으면 ‘생뚱맞게 무슨 소릴 하는 거야’라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일단 <하루살이>를 읽기 전에 <얼간이>를 읽고 오시는 편을 추천한다.

갑자기 찾아온 하루살이

에도 후카가와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사건들을 단편처럼 엮어나가며 소소하게 진행되던 상권 막바지에 갑자기 거대한 장편 ‘하루살이‘가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처음에는 ‘허, 상권의 대부분을 프롤로그로 잡아먹은 건가?’라고 생각했지만 그보다는 그 단편들이 독립적인 단편이나 하다못해 옴니버스식으로 진행되는 것도 아니라 전부 ‘하루살이’의 복선으로 기능하는 밑밥이었던 거다. 언제나 어떤 사건이 발생하기까지의 큰 계기란 굉장히 작고 눈에 띄지 않는 일인 경우가 많은데 후카가와 사람들의 사소한 일상이 그야말로 그렇다. 짱구의 열병, 부부 사이의 작은 불화, 하녀의 구직, 어린 아가씨의 혼담, 매일같이 조림 사먹으러 오는 남자. 이 자잘한 일 사이사이를 관통하는 어떤 커다란 흐름 같은 것이 ‘하루살이’에 이르러 폭발하듯 사건의 본질을 향해 달려간다.

어머니에 대한 어느 한 남자의 깊은 원망

오랫동안 어머니에게서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며 원망을 품고 살던 남자가 어느 날 그 어머니의 시체 옆에서 망연자실한 상태로 발견되었을 때, 누구라도 정황상 그 남자를 범인으로 몰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친한 사람들조차 ‘그는 절대로 사람을 죽일 만한 성격이 못 되지만, 그 어머니라면 또 모르는 일이다’라고 생각할 정도의 깊고 오랜 원망이었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사람들의 욕망인지 회한인지 후회인지 고집인지 악인지 모를 무언가의 카오스 같은 감정은 뭉클뭉클 뒤엉켜 결국 책임 소재를 추궁할 수 없게 만든다. 옛날이든 요즘이든 진짜로 뼛속까지 악한 사람은 없는 법이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지켜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더 답답한 것도 사실이다. 세상 일이 단순하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루살이 총평

여하튼 누군가의 오래 묵은 숙원이 풀리고 위에서 잠깐 나왔던 어린 아가씨가 혼례를 올리는 대단원이 막을 내리면서 미야베 여사님은 다시 한 번 ‘하루살이’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작고 위대한 모습을 이야기한다. 어쩌면 아무리 커다란 사건이 일어나 일상을 뒤흔들어 놓더라도 ‘하루하루’의 ‘일상’이라는 존재를 통째로 없애버리지는 못한다는 거. 다들 큰일을 딛고 다시 또 하루 먹을 거리를 벌러 나간다는 거. 역자후기를 읽으면서 <하루살이>라는 제목에 다시 한 번 감탄한다.

오스틴 프리먼, 붉은 엄지손가락 지문

손다이크 박사의 현대적인 작품

아주 어렸을 때 손다이크 박사가 등장하는 단편 작품을 딱 하나 읽은 적이 있었다. 지금 찾아보니 ‘알루미늄 단검’이었던 거 같다. 여러 작가가 뒤섞여 실려 있었던 추리 앤솔로지였는데 그 속에서도 그 작품 하나만이 유난히 이질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다고 기억한다. 현장을 관찰하고 용의자를 닦달하며 단서를 모아 추론해내는 방식이 대부분이었던 다른 단편들과 달리 붉은 엄지 손가락 지문에서의 손다이크 박사만큼은 가장 ‘현대적’인 방식으로 범인을 잡아냈더랬다. 아마존에서 보니 ‘레트로 CSI’라는 평이 있던데 딱 그 느낌이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홈즈와 딕슨 카의 중간적인 맛도 나는 거 같다.

붉은 엄지손가락 지문

패러다임을 부수는 탐정

국내에 딱 하나 나와 있던 오스틴 프리먼의 작품 <노래하는 백골>도 단편집이므로 장편으로 붉은 엄지손가락 지문의 손다이크 박사를 읽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뭐랄까, ‘패러다임을 부수는’ 스타일의 탐정이라는 게 마음에 들었다. 다이아몬드가 사라진 현장에 남아 있는 것은 피묻은 엄지손가락 지문 딱 하나뿐이고 그 지문의 주인이 범인이라는 건 삼척동자가 봐도 알 만한 사실인데 역으로 전제를 의심하여, 그 지문이 과연 믿을 만 한 증거인가를 파고드는 ‘발상의 전환’은 지금 봐도 신선하다.

좁은 범위의 용의자

애초에 용의자의 범위가 무척 좁아 범인이 얘 아니면 쟤인 상황에서 사실 후더닛은 별 의미가 없다. 대신 당시 갓 시작된 과학수사로 인해 팽배했던 지문맹신주의를 공격하며 그렇다면 범인이 어떻게 그 지문과 관련이 있는가에 대해 알아가는 하우더닛 추리라면 꽤 재미가 있다. 이런 모습을 보니까 대략 90년대 정도에 살짝 퍼졌던 ‘루미놀 만능주의’가 떠올라 웃음이 나기도 한다. 하여간 뭐든 신개념이라고 너무 맹목적으로 믿다간 큰코다칠 것이다.

작품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

애초에 손다이크 박사가 등장하는 시리즈의 첫 작품이기 때문에 레귤러 캐릭터에 대한 깨알같은 설명이 붙어 있는 것도 덤으로 재미지다. 손다이크와 저비스의 재회 및 관계성, 조수 폴튼이 그렇게 손다이크 박사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는 이유 같은 것도 재밌었다. 손다이크 박사의 은근한 유머 감각이나 정신 사나운 혼비 노부인의 부산스러움도 즐거웠고, 요소요소 들어있는 에드워드 시대의 귀여운 연애 이야기도 재밌었다. 근데 그 아가씨 다른 책에는 안 나오는 거 같던데, 저비스의 연애는 어떻게 되는 건지 지금까지도 궁금하다.